충북알프스 2구간
▣ 일 시 : 2007년 9월 26일(수)
▣ 산행지 : 충북알프스 2구간
▣ 인 원 : 2명(청량, 余)
▣ 코 스 : 장고개(09:20) - 동관음 - 못재 - 갈령삼거리 - 829봉 - 형제봉(중식)
- 피앗재 - 677봉 - 703봉 - 천황봉 - 덕목리(17:40)[16.3km]
* 동학의 보은집회 장내리
1893년(고종 30) 3월 11일부터 4월 2일까지 보국안민(輔國安民)과 척왜양창의(斥倭洋倡義)를 기치로 보은 장내리(帳內里)에서 열린 동학집회.
이 집회를 전기로 동학교도의 교조신원운동은 사회개혁과 반외세투쟁으로 전개된다. 1892년 11월 삼례집회와 1893년 2월의 복합상소(伏閤上疏)가 성과없이 끝나고 동학에 대한 지방 관아의 탄압이 계속되자, 3월 10일 교주 최제우의 제례를 위해 간부들이 모인 청산면 포전리 김연국의 집에서 정부에 압력을 넣기 위해 동학교도들을 보은 장내리에 집결시키는 통유문을 보냈다. 이때 통문을 발함과 동시에 각 접주(接主) 중에서 유력한 자를 골라 각 포(包)의 대접주로 임명하고, 그들에게 포명을 주어 교구의 구분과 연락을 원활히 하도록 했다. 장내리는 이해 초부터 교주가 대도소를 두고 주재함에 따라 각 처의 교도들이 찾아오게 되어 잘 알려진 장소였고, 관헌의 지목과 추적에 쫓긴 교도들이 모여 있던 곳이었다. 일단 집결 지시가 떨어지자, 동학교도들은 매일 각처에서 각각 수백 명 단위로 몰려와서 며칠 만에 수만 명에 달했다. 이들은 보은취회에 참여한 남접과 연합하여 보은취회를 종교적인 성격에서 정치적인 성격으로 전환시키고자 했다.
장내리는 집들이 옥녀봉 기슭을 둘러싸듯 들어차 있었는데, 그중 큰 기와집에 동학 도소가 설치되었다. 동학교도들은 각기 긴 장대에 깃발을 만들어 걸고, 자갈을 모아서 성을 만들었으며, 낮에는 천변에 모였다가 밤이 되면 부근 마을에서 흩어져 잤다. 돌성 안에 모인 동학교도들은 노래를 부르고 주문을 외쳤는데, 이러한 종교의식은 각지에서 모인 교도들을 단결시켰다. 또 관군이 와서 공격할 것에 대비하여 각 조직은 군사편제처럼 움직였으며, 북산과 남산에 깃발을 꽂고 40~50명이 지켰다. 집결한 교도의 수는 기록마다 다른데, 1명당 돈 1푼씩 걷어서 모두 230냥이 되었다고 한 것을 보면 적어도 2만 3,000명 이상이 모였던 것을 알 수 있다. 이들의 양식은 각기 직접 며칠 분씩 가지고 와서 해결하기도 했고 또 교단에서 식량조달을 책임진 사람들이 준비하기도 했다.
보은 관아와 감영 그리고 정부에서는 동학교도들을 해산시키기 위해 장위영 정령관 홍계훈으로 하여금 보은에 관군을 주둔시키게 하는 한편 호조참판 어윤중을 양호도어사와 선무사로 임명하여 수습하게 했다. 어윤중은 동학교도들의 대표와 만나 척양왜척 항목을 중심으로 집회의 의도에 대해서 자세히 들었다. 그리고 외세배척의 주장을 고종에게 상달하겠다고 약속하고 해산을 종용했다. 고종도 윤음을 거듭 내려 해산을 명했다. 이와 함께 장위영 군대 600명이 동학교도들을 해산시키기 위해 3월 30일 청주에 도착했다. 동학교단의 지도부가 정면 충돌을 피하기 위해 해산을 결정하자, 동학교도들은 4월 2일 장내리를 떠나기 시작했다. 20일간 집결해 있었기 때문에 지쳐 있던 동학교도들은 각기 고향을 향해 출발했고, 교주 최시형도 상주 방면을 향해 떠났다.
<브리즈태니커백과사전>
▶丙申年(1896년) 三月 二十日
二十日 本鄕會員十餘人 來見 請受制防守 選私 五十名 許施是夜
金華山弟子元也 請劒舞於軍中 誦呪踊躍 極爲怪亂 一軍駭聽 須臾中軍來請付罰 余謂中軍曰 弟子之惑 雖先生之誤不可 先施其師元也 改付之 鳴鼓之律爲當 諸將 請 妖言動衆 罪不得已師弟二人 俱勘重罪囚本郡獄
삼월 이십일 이 마을 회원 십여 명이 와서 접견하였는데 制防守를 받을 것을 청하여 마음에 드는 화포병 50병을 뽑아서 이날 밤 시행할 것을 허락하였다.
김화산의 제자 元(자원)이 軍中(군중)에서 劍舞(검무)를 한다고 청하여 呪文(주문)을 외우며 춤추는 것이 지극히 괴이하고 어지러워 모든 군사들이 해괴하게 받아들였다. 잠시 후에 中軍(중군)이 와서 벌을 줄 것을 청하였다. 내가 中軍(중군)에 일러 말하기를 '제자의 미혹함은 비록 선생의 잘못이 아닐지라도 먼저 그 스승인 원에게 벌을 줘 고쳐 줘야한다. 軍律(군률)을 행하는 것이 마땅하다.' 여러 장수들이 나란히 청하기를 '괴이한 말로 군중을 선동하였으니 부득이 스승과 제자 두 사람에게 죄를 물어야 한다' 고 하여 함께 重罪(중죄)로 죄인을 詰問(힐문)하여 本郡(본군)의 獄(옥)에 가두었다.
충북알프스 2구간은....
산행의 목적보다는 그 주변 갈곡과 갈령 청계사와 고교 부근 묘막의 위치를 가늠해 보기 위한 걸음이었다. 묘막은 지명인가? 숨어 있기위한 은신처인가? 를 알지 못하니 시간이 필요할 듯하다.
장내리 식당은 명절 뒤라 식사를 할만한 곳이 없었다.
아침을 굶고 산행할 수도 없는 일이라 삼가리를 지나 만수계곡에 피앗재 산장에서 청량은 아침을 먹고 <다정>님이 장고개까지 차량을 운행해 주신다.
비알을 올라 바로 능선 길에 붙는다. 바람은 살갑게 불어오고 생각과는 달리 우거진 숲으로 인해 시계과 조망은 없다. 앞을 향해 무조건 걷는 단순한 반복된 동작이 오히려 머리를 맑게 한다.
상주로 넘어가는 동관음 고개를 지나 못재 삼거리에 Daum/블로그 넘버-2님이 붙인 이정표 있어 백두대간과 합류함을 알 수 있다. 형제봉에 도착하니 비로서 사방이 조망이 트여 있다.
4시간을 돌고 돌아서 온 길인데 피앗재 산장 20분이라는 이정표를 보니 피식 웃음이 나온다. 천황봉으로 이어지는 길은 오르막 내리막이 이어지면서 차츰 고도를 높여간다. 대목리 삼거리가 나오고 천황봉에 도착 청주에서 오신 부부 산객에게 물 한모금 얻어 마시고, 정상주를 권하기에 몇 번 사양하다가 그냥 마실 수가 없어 쇠고기 부채살을 구우니 출출하다며 맛있게 먹는 모습이 아름답다.
대목리로 내려오는 하산길은 잔돌 너덜로 계곡을 다 내려와야 물이 흐른다. 돌탑이 있는 기도터에서 임도를 따라 내려오니 미륵불을 세워 놓은 시설이 있고 조금 내려오니 천황사 대웅전이 있다.
약속한 시간이 되어 <다정>님의 차로 피앗재 산장으로 이동 밀양에서 오신 다섯분, 청주에서 오신 홀로 산객 한분과 막걸리 한 잔 마시고 산장에서 준비한 저녁을 먹는다.
송이밥 향기가 아주 좋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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