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六友堂記/산행기록

두류산일록을 읽고 상류암址를 찾아서I(151031~1101)

도솔산인 2015. 11. 2. 10:38

 

두류산일록을 읽고 상류암址를 찾아서I(151031~1101)

 

 

▣ 일   시 : 2015년 10월 31일 ~ 11월 01일

▣ 코   스 : 새재 - 치밭목 - 영랑재 - 청이당 - 진주독바위 - 새봉 - 새재 - 새재마을

▣ 인   원 : 5명(산친들과)

 

 

 

홀로 상류암址는 과연 어디일까? 라는 疑問을 가지고 지리에 들었다.

일행 분들이 面은 있지만 산행이 처음이라 내 생각을 말할 수 없었다.

 

산행 중에 박여량 두류산일록 이야기가 나왔고 어떤 분에게 진주독바위 아래에 진주암이라는 암자터와 또 다른 암자터가 있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암자터가 인근에 두 개 있다면 <두류산일록>의 기록과 일치하고, 천왕봉 천왕당에서 느린 걸음으로 진주독바위까지는 하루에 갈 수 있는 거리다.

 

그 분은 '독바위 아래에 진주암지가 있고 인근에 또 다른 폐사지가 있는데 두 곳에서 써리봉과 조개골이 보인다.'고 하였다.

 친절하게 '同名의 진주암은 지리산 주변 여러 곳에 있다.'는 말도 덧붙였다.

 

 

 

 

 

 

 

 

 

 

 

 

 

 

 

 

 

 

 

 

 

 

 

 

 

 

 

 

 

 

 

 

 

  

 

 

 

 

 

가문비나무 숲속에서 바람 한 점 없는 10월의 마지막 밤!

문어가 젤트안으로 들어와 산사람들의 이야기를 도왔다.

 

도필락님이 다음날 일정을 '독바위 쪽이 어떤가?' 제안을 했고

내 생각이 읽힌 것이 아닌가? 깜놀했지만 한 편으로 반가웠다.

 

젤트 밖으로 나오니 밝은 달은 장구령의 <望月懷遠>이 생각나게 하더라.

달빛을 손에 담아서 드릴 수 없으니/다시 잠들어 꿈속에서나 만나렵니다.

  

 

 

 

 

새벽 4시에 기상하여 따뜻한 커피로 몸을 녹이고

감수재 박여랑처럼 秋露酒를 한 잔씩 나누었는데

아침 내내 도필락님은 다리가 풀렸다고 하시더라

 

 

 

 

 

여명이 밝아오더니 하늘에는 옅은 구름이 뒤덮였고 일출이 없음을 예고했다.

영랑대 오르는 밧줄은 소나기와 첫눈이 내리던 날 밤 은밀히 제거된 것 같다.

 

 

 

 

 

 

지리동부에 우뚝 솟아있는 큰바위 얼굴과 고사목 한 그루!

하늘의 기운이 모여 산의 기운과 만나는 곳을 바라보았다.

 

 

 

 

 

 

 

 

 

 

요즘 <임아무개>님은 가운데 솟은 바위를 절차탁마 중이란다.

믿거나 말거나 그러나 이 이야기는 엄연한 팩트고 진행형이다.

 

 

 

 

 

이른 새벽 무채색의 회색 가을과 조망의 아침

山群이 여명을 벗은 모습이 赤裸裸 드러났다.

 

 

 

 

 

 

 

 

 

 

 

 

 

 

 

 

 

 

 

 

 

아침 산책을 마치고 진주독바위를 가기위해 짐을 꾸렸다.

 

 

 

於于堂 柳夢寅(1559~1623)의<遊頭流山錄>에 자세하게 기술된 少年臺

 

 

 

 

 

 

 

 

 

 

 

 

 

 

영랑대를 우회하는 길은 희미하여 사람이 다니지 않은 것 같았다.

하봉 동릉쪽 나뭇가지에 목을 맨 시그널이 바람에 파르르 떨었다.

 

필요한 곳에 달면 길잡이지만 겨울에 잘못 읽으면 죽음의 시그널!

시그널 보고 반갑다는 사람을 보면 사물과 대화하는 능력이 있다.

 

 

 

진주독바위

 

 

이곳의 옛 지명이 진주목 산음현이라 <진주독바위>라고 했다고 한다.

 

<진주독바위> 앞의 산죽 밭 사진 포인트에서 아래로 희미하게 길이 있어,

조금 내려가 길을 확인했고 그곳에서 조개골과 써리봉이 정면으로 보였다.

구렁의 끝은 철모삼거리요. 좌측으로 독바위 능선을 넘으면 독바위양지다.

 

 

 

 

 

 

 

 

 

옹암에 오르니 일망무제의 공지선, 조개골 물소리가 눈과 귀로 들어왔다.

진주독바위 직전 골짜기는 철모삼거리 위에서 청이당계곡과 합류하였다.

조개골은 써리봉에서 동북으로 흐르다 철모삼거리에서 정동으로 흐른다.

 

독바위 뒤편으로도 독바위양지로 내려가는 길이 있었다.

 

 

[두류산일록] 7일 무신일 맑음. [1610년 10월 23일 土 霜降]

 

[원문]將盥僧請湯水而沃盥。余辭之。乃就水槽水。掬淸注而頮之。菴西有臺頗可觀。臺上有檜三四株。其大僅一掬。其長已三四丈矣。旣以無曲之根。又得養之而無害。其爲他日有用之材可知矣

 

[국역]세수를 하려는데 이 암자의 승려가 물을 데워 세수물을 준비하겠다고 하였다.

나는 사양하고 물통으로 가서 맑은 물을 움켜 낯을 닦았다.

 

암자 서쪽에는 너럭바위가 있는데, 주위의 경치가 제법 볼만했다. (국역오류)

 

곁에 회나무 서너 그루가 있었는데 이제 겨우 한 움큼 정도의 굵기였고 길이는 서너 장쯤 되었다.

밑동이 곧기 때문에 해를 입지 않고 잘 자라고 있으니 뒷날 유용한 재목이 되리라는 것을 알겠다.

 

 

戊申일은 만세력과 하루 차이가 난다. 만세력에는 己酉일이다.

새로 국역하면 암자 서쪽에는 臺가 있는데 자못 볼만했다.

 

[두류산일록] 원문과 국역의 차이가 너무 분명하게 확연하다.

너력바위에 올라가보니 주변경치가 제법 볼만하다.고 했는데,

이것은 국역의 오류가 아닌가? 臺의 의미는 설명하지 않겠다.

 

나는 이 기록을 상기하며 대(臺)를 독바위라고 생각했다.

 

상류암 조금 서쪽 암자 숙소에서 잠을 자고 일어나 세수를 하고

문득 올려다 본 진주독바위의 모습을 묘사하고 있기 때문이다.

 

빙의에 걸린 듯 아침 햇살에 붉은 물든 독바위 모습이 떠올랐다.

 

 

 

 

 

 

 

 

 

 

 

 

 

새봉까지 산죽 구간의 산죽은 열매가 맺히고 잎이 말라 죽어가고 있었다.

두류산일록의 三必死說이 떠올라 잠시 걸음을 멈추고 사방을 둘러보았다.

감수재의 '고인의 기록은 틀리는 것이 한 가지도 없다.' 는 말이 떠올랐다.

 

 

 

 

 

 

[박여량 두류산일록 한 구절 9/7]

 

[원문] 汝昇取僧家一書而觀之。有必死之說。竹有實必死也。螺有孕必死也。人有疾必死也云。

[국역] 박여승은 불가의 책 한 권을 보고 있었다. 그 책에는 ‘삼필사설(三必死說)’이 있었는데, 대나무는 열매를 맺으면 반드시 죽고, 소라는 새끼를 가지면 반드시 죽고, 사람은 병이 있으면 반드시 죽는다.고 하였다.

 

 

[대나무 열매(竹實)]에 대하여

 

조릿대는 5년에 한 번 정도 꽃이 피며 일반 대나무는 20년에서 60년, 또는 120년만에 한 번씩 한꺼번에 꽃을 피우고 죽는다고 한다. 대개 꽃이 피면 대나무는 말라죽게 된다. 이는 개화로 인하여 땅속줄기의 양분이 소모되어 다음 해에 발육되어야할 대나무 순의 약 90%가 썩어버리기 때문이다.

 

대나무 수명은 최고 150년으로 꽃필 때에는 온 죽림이 일제히 핀 뒤 거의 다 말라 죽는다. 전 세계에 1250종이 있으며 우리나라에서는 19종이 자생 또는 재배되며 대나무꽃이 지면 열매가 달리는데 이를 竹實이라고 한다. 죽실竹實을 먹으면 여자가 잉태하는 기능이 약해진다고 한다. 죽실은 신명을 통하게 하고 몸을 가볍게 하며 기운을 돕는다. 주로 보신제로 이용한다고 한다. 죽실은 낱알 생김새가 보리쌀과 비슷하다. 죽실竹實은 찰기(粘性)이 있고 맛이 수수와 비슷해서 떡이나 밥을 해먹는다고 한다. 그래서 죽실은 竹米 또는 野麥, 練實이라고 불렀다.

 

실제로 1894년 동학농민항쟁이 일어나던 해에 큰 흉년이 들어서 초근목피로 연명했는데 마침 하늘이 도왔는지 山竹(조릿대)에 꽃이 피더니 竹實이 열려서 그해 가을 산간 사람들이 죽실竹實로 밥도 짓고 수제비도 끓이고 해서 아사를 면했다고 한다. 그 밖에 죽실竹實로 술을 빚어 마시거나 국수를 만들어 먹는다고 한다.

 

<증보문헌비고>에는 조선 태종 때 강원도 강릉 대령산 대나무가 열매를 맺어 모양이 보리와 같고 찰기가 있으며 그 맛도 수수와 같아 동네 사람들이 식량과 술을 만들었다. <지봉유설>에는 지리산에는 대나무 열매가 많이 열려서 그 지방 사람들이 밥을 지어 먹었고 울릉도에서는 비축 식량이 떨어져서 굶어죽게 되었는데 마침 대나무가 결실을 맺어 대나무 열매와 산마늘로 연명하여 기아를 면할 수 있었다는 기록이 있다.[출처 : 다음블로그 야생초와 버섯]

 

 

 

 

 

 

 

 

 

 

[두류산일록 9/6일 두류암 갈림길에서 상류암까지]

 

[원문] 至頭流上流兩庵之路。頭流昔余所遊息。上流則未也。余請諸君強取上流之路。上流乃妙雲所新創。而於上峯路未出者也。僅尋樹陰下一條潦路。或由岡脊。或臨壑谷。魚貫而下。至一懸崖。上無所攀。下可數丈。諸君與從僧皆蟻附而下。余則不得着足。周章之際。遠聞伐木聲。盖巖僧已慮其如此。設機械而令我下來也。旣至菴一行俱困。

 

[국역] 두류암과 상류암으로 가는 갈림길에 이르렀다. 두류암은 예전에 내가 유람하며 쉬었던 곳이지만, 상류암은 아직 가보지 못한 곳이라 나는 여러 사람들에게 상류암으로 가는 길을 선택하도록 강요하였다. 상류암은 묘운이 새로 지은 곳으로, 상봉에서 내려가는 길이 아직 나지 않았다. 숲 속에 난 한 갈래 도랑길을 겨우 찾아 등성이를 넘기도 하고 골짜기를 따라가기도 하면서 물고기를 꿴 것처럼 한 줄로 내려갔다. 한 낭떠러지에 이르렀는데 위로는 잡을 만한 것이 없었고, 아래로는 몇 길이나 되는 절벽이었다. 다른 사람들과 따라온 승려들 모두 개미 떼처럼 절벽에 붙어 내려갔는데, 나는 발을 내딛지 못했다. 어쩔 줄 몰라 안절부절하고 있을 대, 멀리서 나무를 베는 소리가 들려왔다. 이는 산을 잘 타는 승려들이 내가 못 내려오리라 짐작하고 기구를 설치하여 나를 내려가게 하려는 것이었다. 이미 상류암에 이르렀을 때는 일행이 모두 기진맥진했다.

 

 

 

 

 

 

새봉에서 이쪽 시그널이 헛길로 나를 유혹했지만 일방에 뿌리치고,

너럭바위에서 한 시간 넘게 조개골을 바라보다가 새재로 내려섰다.

 

 

 

 

 

 

 

 

 

 

 

 

 

감수재 박여량의 <두류산일록>을 수차 爛讀하고 지리에 들어

긴 조릿대 터널을 지나오니 아직 그곳에 가을이 머물러 있었다.


 

 

 

# <상류암지>에 대하여

 

 상류암에 대해서 【진양지】 불우조(佛宇條)에서는 『장항동(獐項洞) 위쪽에 있는데, 난후(亂後)에 중건(重建)하였다(在獐項洞上, 亂後重建)』고 하였고, 산청군지(山淸郡誌)】내고장 전통(傳統)편 寺址 목록에서 『上流庵址는 삼장면 油坪里에 있다』고 하였다. 진양지 산천조의 덕산동(德山洞) 지명에서는 『서흘산(鉏屹山)으로부터 동쪽으로 흘러 상류암(上流菴)을 거쳐 장항동(獐項洞)이르고 남쪽으로 흘러 삼장천(三壯川)되어 살천(薩川)으로 더불어 양당촌(兩堂村)앞에서 합하니 이를 덕천(德川)이라 이른다.』고 했다. [출처 : 지리99 가객님 상류암지] 

 

1. 99탐구팀이 찾은 상류암지는 두류산일록의 기록과 일치되는 부분이 없다. 우리는 여기에서 유생 신광선을 주목할 필요가 있다. 신광선의 집은 일행들 중 방곡마을에서 가장 가깝다. 임천 신광선의 집에서 방곡의 상계, 사립재, 상류암과 두류암의 갈림길을 역추적하면 상류암의 위치를 가늠할 수 있다.

 

 [누락부분9/7] 방곡의 上溪까지 내려오니 종들이 말을 가지고 와서 기다렸다. 계

곡 가에 앉아서 각각 마음을 진정시킨 후에 남여를 버리고 말을 탔다.[下至方谷之上溪。奴輩以馬來待矣。臨溪而坐。各罷鎭心。舍輿乘馬。]

 방곡촌(方谷村)지나는데 마을의 집들은 다 대나무를 등지고 집을 지었으며 감나무로 둘러 싸여있고 인가와 접하였으나 화평함이 속세를 벗어난 지경과 같았다. [村舍皆負竹爲家。繚以柿木。鷄鳴犬吠。洽一別境也。]임천을 건너[越瀶川] 신광선의 정자에서 술을 서너 순배 마셨다.

 

• 9/6 : 천왕봉 - 甑峰 - 마암 - 소년대 - 행랑굴 - 두류암과 상류암 갈림길 - 상류암

9/7 : 상류암 - 초령[사립재] - 방곡촌(方谷村) - 신광선(愼光先)의 정자 - 최함씨의 계당(溪堂)

 

 9월 6일 일정에서 부축을 받고 열 걸음을 걷고 한번 쉬어야하는 박여량이 천왕봉에서 유평까지는 불가능한 거리다. 유평에 상류암이 있다면 지도를 보아도 확연한 코스 이탈이다. 지금은 도로가 있지만 길도 없는 길을 만들며 조개골을 따라 유평까지 내려왔다가 다음날 다시 올라갔다는 것은 한마디로 소설이다. 그리고 청이당에서 내려갔다면 이미 艾田嶺(쑥밭재)이 있어 왕래하는 길이 있었을터, 두류암과 상류암 갈림길에서 상류암까지 길이 없다고 분명히 기록하고 있다. 우리는 새재마을도 삼장면 유평리라는 것을 염두에 두어야한다.

 

 

2. 초령은 함양과 산음의 분기점이다. 산음은 산청의 옛이름이다. 그렇다면 초령은 사립재다. 9/7일 일정은 여유 있는 일정이었다. 계곡에 앉아 숨도 돌리고 임천을 건너 일행인 신광선의 정자에서는 술도 서너 순배 마셨고 최함씨의 계당에서 묵었다. 9/7일 유평에서 출발해서 초령을 넘어 - 방곡 상류 - 임천의 일정은 절대 불가능한 거리이다.

 

3. 鉏屹山은 鉏耒峰(서뢰봉 써리봉)이다.

 

【진양지】와 【산청군지】의 기록을 근거하여 추정한다면 상류암은 청이당 계곡을 따라 내려와 조개골 가까운 곳[독바위 양지]에 암자가 있었을 것이다.【진양지】에 나오는 鉏屹山은 써리봉을 가리킨다. 지금의 鉏耒峰의 옛 이름이 鉏屹山이고 서뢰(鉏耒)는 농기구의 일종으로 경상도 방언으로 써리 또는 써레로 발음되어 써리봉이 된 것이다. 상류암 위치는 새재마을보다 그 위에 위치해 있다고 추정된다.

 

 

 

 

조개골에서 바라본 독바위

 

 

4. 是年是月之日。書于桃川

之感廬 의 국역 오류

 

 

모년 모월 모일 도천의 감수재(感樹齋)에서 쓰다.

 

* 是年是月之日(제년제월지일) : 是月(제월)은 월말 그 달의 끝 무렵을 뜻한다. 모년모월모일은 국역의 오류인듯 싶다. 是年(제년)은 같은 해이고 是月(제월)은 같은 달 월말이니 9월 그믐을 뜻한다. 같은 해 경술년(1610년) 9월 그믐 무렵에 쓰여졌다. 감수재 박여량은 산행 후유증과 감기로 9월 16일 척서정 산행 강평 모임에도 나가지 못했고 최소한 20일 넘게 심하게 앓았다는 증거다. 是는 齊와 同字로로 읽어야하고 처음 하는 어휘다. 두류산일록에서 간지와 날짜가 하루 차이가 있는데 만세력이 틀린 것이 아니고 감수재 박여량의 오류일 가능성이 있다. 왜냐하면 산행을 한 후 몸이 좋지않은 상태에서 시간이 지난 뒤에 기록했기 때문이다. 

 

5, 영신암지와 영랑재처럼 고증이 되지 않은 내용이 온라인을 타고 순식간에 퍼지면 그 수습은 걷잡을 수 없고 오류가 오류를 재생산하는 지명에 대한 혼란을 초래할 것이다. 안타깝게도 지리99의 지리산길 지도4,1에 아직도 1618봉 안부가 영랑재라고 표기되어 있다. 우리는 이 시점에서 잠시 멈추고 지나온 것들을 다시 돌아보아야 한다. 자기중심적인 사고로 바라보았던 산에 대하여 타인의 생각은 어떤지 묻고 듣고 다시 생각해야할 것이다. 진짜와 구분이 되고 비슷한 것은 가짜라는 뜻이다. 거울에 형체를 비추면 좌우가 상반되고 물에 형체를 비추면 아래 위가 상반되어 비슷하다고 할 수 있는가? 상류암이 노루목의 위쪽에 있다고 하여 유평 인근 무명 암자터를 상류암이라고 한들, 산을 알고 글을 아는 자는 더 더욱 납득하기 어려운 일이다. 끝. [검증되지 않은 개인적인 사견이니 여과해서 살살 읽으시길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