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랑대(永郞臺)에서 다시 읽어보는 청이당 이야기
▣ 일 시 : 2025년 12월 06일(토)~07일(일)
▣ 코 스 : 광점동-어름터-방장문-쑥밭재-청이당-영랑대-국골사거리-청이당-광점동
▣ 인 원 : 3명
▣ 날 씨 : 토요일 아침 영하 8도, 맑음(영랑대 영하 3도)
향로봉(香盧峰)이 상로봉(霜老峰)에서 상내봉이 되었듯, 천례당(天禮堂)에서 청이당(淸伊堂), 청이당(淸夷堂), 천녀당(天女堂)이 되었을 것이다. 당터 앞에는 김종직선생이 쉬어간 계석(溪石)이 있다. 당터 조금 아래에는 거대한 바위가 있는데 천례탕(天禮碭)으로 추정된다. 천례탕(天禮碭) 전면에 축대 흔적이 남아있다.
청이당에 대한 유람록의 기록은 1472년 김종직의 「유두류록」에는 청이당(淸伊堂), 1611년 유몽인의 「유두류산록」에 청이당(淸夷堂), 1871년 배찬의 「유두류록」에는 천녀당(天女堂)으로 기록하고 있다. 1472년 김종직이 쉬어간 계석(溪石)은 청이당터 석축 앞 약 20m 지점에 위치해 있다. 1871년 배찬 선생은 이곳에서 '계곡 옆의 바위 위(澗邊石上)에 빙 둘러앉아서 밥을 먹었다' 라고 한 장소는 같은 바위로 추정된다. 조선일보 칼럼니스트 조용헌 박사는 화랑들이 하늘에 제사를 지냈던 바위를 천례탕(天禮碭), 당집을 천례당(天禮堂)으로 청이당(김종직, 유몽인)과 천녀당(배찬)의 어원으로 보고 있다. 천례탕(天禮碭)에서 '碭(탕)'은 고금이체자 자전에 唐(당)의 이체자이다. 碭을 당으로 읽으면. 천례당(天禮碭)이다. 참고로 함양과 산청의 군계는 하봉 옛길로 지금도 청이당터는 함양ㄱ 땅이다.
1. 1472년 김종직의 「유두류록」
[원문] 抵淸伊堂。以板爲屋。四人各占堂前溪石上。小憩。
○ 1472년 8월 15일, 청이당(淸伊堂)에 이르러 보니 지붕이 판자로 만들어졌다. 우리 네 사람은 각각 청이당 앞의 시내 바위를(위에서) 차지하고 앉아서 잠깐 쉬었다.
☞ 占堂 : 청이당
2. 1611년 유몽인의 「유두류산록」
[원문] 癸酉. 侵晨而行掠甕巖. 入淸夷堂. 穿森木亂石叢. 至永郎臺.
○ 1611년 4월 4일, 계유일. 새벽에 길을 떠나 옹암(甕巖)을 지나 청이당(淸夷堂)에 들어갔다. 숲을 헤치고 돌무더기를 가로질러 영랑대(永郞臺)에 이르렀다.
3. 1871년 배찬의 「유두류록」
[원문] 小憇于嶺上. 過艾峴. 到天女堂平田. 從者進午飯. 遂環坐於澗邊石上. 各執匏器. 折木爲匙. 足爲免飢. 各吟一律拈平田之田字.
○ 1871년 9월 5일, 산마루 위에서 잠시 쉬었다가 애현(艾峴)을 지나 천녀당평전(天女堂平田)에 이르렀다. 시종(侍從)들이 점심을 내와서 마침내 모두 계곡 옆의 바위 위[澗邊石上]에 빙 둘러 앉아서 각자 바가지 그릇을 잡고 나무를 꺾어 젓가락을 만들어 밥을 먹으니 배고픔을 면할 만하였다. 각자 평전의 ‘전(田)’ 자를 끄집어내어 시 한 수씩을 읊었다.
4. 1924년 강계형의 「두류록」
[원문] 漸漸前進置艾峴. 路於左便而取右. 路踰麓. 則天禮碭也.
○ 1924년 8월 18일(송대 출발) 점점 앞으로 쑥밭재[艾峴애현]로 나아가는데 길은 왼쪽으로 가다 오른쪽으로 향했으며 산기슭을 넘자 천례탕(天禮碭)이었다. [출처 지리9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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