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崇祖惇宗/독립운동

운강 이강년 의병대장 순국 114주기 추모제향

도솔산인 2022. 10. 14. 23:58

운강 이강년 의병대장 순국 114주기 추모제향

 

 

▣ 일 시 : 2022년 10월 13일(목)

▣ 장 소 : 운강 이강년 기념관

 인 원 : 대전에서 이강필님, 이강섭님

▣ 날 씨 : 맑음

 

 

 

 

지산유고 창의일기에 나오는 선유동

 

○ 丙申年(1896년) 三月 二十七日

 

  二十七日 踰葛嶺 抵高橋 問宗人秉禧 居喪中 火于壯岩李交河家 堤川召募將李華榮 執富人吳進士 與金都事 載前載後 余心不樂 先發至松面 松面近地 無一人 安業者細細 探得前到十輩 不知何許無名 而逢人必討逐戶 而索可駭 分付中營 捕捉不得 且聞炮殺尙州首吏與申倅 中房云耳 進宿仙遊洞

 

  삼월 이십칠일 葛嶺(갈령)을 넘어 高橋(고교)에 이르렀다. 宗人(종인) 秉禧(병희)를 찾아갔는데 喪中(상중)에 있었고 장암 李交河(이교하)의 집에 불이 났다. 堤川(제천) 召募將(소모장) 李華榮(이화영)이 부자인 吳進士(오진사)와 金都事(김도사)를 잡아서 곧 앞서거니 곧 뒤서거니 하니 내 마음이 즐겁지 못했다. 먼저 출발하여 松面(송면)에 도착했다. 松面(송면) 근방에는 한사람의 인적도 없었고 편안하게 생업에 종사하는 사람이 매우 적었다. 먼저 도착한 10여명의 무리를 찾아서 잡으려 했으나 어느 곳 사람인지도 모르고 이름도 없으나 사람을 만나면 반드시 집에서 벌하여 내 쫓고 돈이나 물품을 억지로 취하니 가히 놀랄만한 일이라 중영에 분부하여 잡도록 하였으나 잡지 못하였다. 또한 尙州(상주) 首吏(수리)와 申守令(원님)을炮殺(총살)하였다고 中房(중방)이 말하는 것을 들었을 뿐이다. 전진하여 仙遊洞(선유동)에서 묵었다.

 

 

 

▶ 지산유고 창의일기에 나오는 한우물(大井) : 경북 문경시 농암면 종곡리

 

○ 丙申年(1896년) 三月 二十八日

 

二十八日 移陣于聞慶大井 去倭站才五十里 招諭諸將曰 吾輩用兵出於不已 而志在撥反 撥反不得 則非徒無益 此去彼站不遠 諸軍其從我進取乎 皆曰 彼强我弱 鋒不可當 俄而濃雲密布 雨下如注 非進趨之時也

 

삼월 이십팔일 陣(진)을 聞慶(문경) 大井(대정)으로 옮겼다. 倭(왜)의 驛站(역참)과의 거리가 겨우 五十里(오십리)였다. 여러 장수들을 불러 깨우쳐 말하기를 '우리들이 그만 둘 수 없음에 의병으로 나왔고, 어지러운 세상을 바로잡아 정도로 돌아감에 뜻이 있으니, 난세를 바로잡아 태평한 세상으로 돌릴 수 없으면, 다만 이익이 없을 뿐만 아니라, 이곳과 저들(倭軍) 驛站(역참)과의 거리가 멀지 않으니, 제군들이 나를 좇아 나아가 왜적들을 취하겠는가?' 諸將(제장)들이 다 말하기를 '저들(日本軍)은 强(강)하고 우리(義兵)는 弱(약)하여 날카로운 기세를 당해낼 수 없습니다.'라고 하였다. 갑자기 짙은 구름이 빽빽하게 널리 퍼지고 비가 내리는데 마치 물을 퍼붓는 것과 같아 군사가 前進(전진)할 때가 아니었다.

 

余乃仰天歎曰 自八月以後 忠憤所激 有出位之思 而提兵數朔 內自相攻 幺麽小賊 容在垣墉 其於十八强國 何且乘輿播越 逼於外夷 哀痛之詔 反爲飭諭 有志之士 陷於無名 功成之前 措躬無地 顧此不佞 欲赴鬪以死 則人不從我 欲歸家安業 則生不如死 寧桴海竄林 待諸君報捷之日 是所望也 此間有子房 願諸君往見之 乃投書于柳兄建一 全付士卒 則建一以其從祖梁山丈 仗義一門 兩擧有所如何云 固不可强

 

내가 이에 하늘을 우러러 탄식하여 말하기를 '팔월 이후부터 충성심과 분개함으로 소용돌이치는 바 자리에서 나올 생각이 있어서 군사를 거느리고 數朔(수삭) 안에 몸소 다스린 일들이 보잘것없이 매우 적다. 작은 도적들의 모습은 그 十八强國의 담 안에 있으며, 어찌 또한 임금의 수레가 도성을 떠나 난을 피하여(俄館播遷) 오랑캐에게 핍박을 당하는가?

 

애통한 詔書(조서:詔勅)는 도리어 勅諭(칙유:임금이 몸소 타이르는 말)가 되었다. 뜻이 있는 선비는 명분이 없음에 빠지게 되었고 성공하기 전에는 몸 둘 곳이 없다. 이곳을 돌아보고 내(재주가 없음:자기의 겸칭)가 나아가 싸워서 죽자고 하면 사람들은 나를 따르지 아니하고, 집으로 돌아가 편안하게 생업에 종사하자고 하면 사는 것이 죽는 것만 못하다고 하니 차라리 뗏목을 타고 바다를 떠돌아다니듯 流浪(유랑)을 하고 숲 속에 숨어서 제군들이 원수를 갚고 승리하는 날을 기다리는 것, 이것이 바라는 바이다.'

 

이 사이에 子房(자방)이 있어 諸君(제군)들을 가서 만나기를 희망하여 이에 柳兄(유형)建一(건일)에게 글을 보내 '사졸들을 전부 부탁한다. 곧 건일은 그 從祖(종조:할아버지의 형제)가 梁山(양산) 어른으로 義兵(의병)을 일으킨 一門(일문)으로 두 사람의 이름을 높이 들어 올림이 어떠한가?' 라고 하였다. 진실로(굳이) 억지로 권할 수 없는 일이다.

 

☞ 류만식(柳萬植, 1860~1926) : 수암 류진의 10대 종손이요 溪堂 유주목(柳疇睦)의 장손이며 아버지는 海史 류도석(柳道奭, 1828-1908)이다. 자는 建一이고 호는 二江이다. 우천 수암종택에는 二江精舍라는 현판이 있다. 二江은 洛坡 柳厚祚의 曾孫인 柳萬植公의 號이다. 柳二江은 우천 수암 종가의 宗孫이기도 하다. 1860년(철종 11년)에 태어나 일정 때인 1926년 향년 67세로 졸했다. 道士林의 천거로 齊陵참봉으로 임명되었다. 박식과 담론으로 大家의 풍도가 있었다.

 

 

대정(한우물 마을)